부마민주항쟁은 무엇일까?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도 마산시에서 일어난 박정희의 유신체제 반대 민주 항쟁이다.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 철폐를 외치며 함께 시위를 시작하였다. 또한, YH 사건, 오일쇼크 등의 사건들도 부마민주항쟁의 발단이 되었다.

이 당시 국민들은 박정희 정부가 유신헌법을 제정 한 이후 학생 운동, 시민 운동 등에 대한 찬성론이 커졌고, 이를 누르기 위해 학생 시위를 탄압했었다.
또한 1차 오일 쇼크, 2차 오일 쇼크를 겪으며 심각한 경기 침체가 찾아왔고 1차 오일 쇼크 이후 발달한 중공업이 경공업 기반인 경상남도에 큰 피해를 주었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산대학교에서는 시위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항쟁 하루 전날인 15일, 부산대학교 내부에서 두 학생이 '민주선언문'과 '민주투쟁선언문'을 각각 배포하며 오전 10시에 도서관에 모여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학생들이 모이지 않자,주동자들은 실패하였다고 단정하고 해산하였고, 정작 10시 40분 이후에 모인 수백 명의 학생들은 주동자가 보이지 않자 해산하고 말았다.

이때, 한 학생이 '선언문'을 작성하고 16일 인문대 학생들에게 유인물을 뿌리며 '저 유신독재정권에 맞서 우리 모두 피 흘려 투쟁하자'라 선동하였다.
마침내 수백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가하였고, 2,000여 명 정도로 불어난 시위대는 시내 진출을 시도 하였다.
또한 전경들이 최루탄을 쏘며 교내로 진입하였는데, 교내의 다른 학생들이 이에 반발해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5000명 가량까지 불어난 시위대는 세 갈래로 나뉘어 각각 대학 담벼락을 무너뜨리고 진압부대를 격파하여 시내에 진출하였다.
시위대는 부산 곳곳에서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쳤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의 계엄령 선포로 시위대는 혹독하고 잔인하게 진압되었고,
정부가 공식 인정한 사망자는 없으나 무자비한 진압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또한 진압 과정에서 인권 침해, 무분별한 구타 등으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피해를 입었고,
최근에 들어서야 진상 규명 관련 법이 제정되거나 기념일로 지정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은 다른 항쟁보다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항쟁이다.
그러나 4.19 혁명 이후 다시 일어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자 민주화 대장정의 큰 줄기를 맡고 있는 항쟁으로써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신준서

수정: 2024/8/24 | 출판: 2024/9/26

Copyright 인클 학생 기자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 데이터 활용 금지.